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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물고기가 다리를 가져야 할 때 - 난곡 새숲도서관과 관악주민연대

2009/05/14 04:37


<박원순의 희망탐사 105>

물고기가 다리를 가져야 할 때?
-서울 최고의 빈민지역 난곡에서 활동가로 산다는 것


면담일시 - 2008년 5월 28일 오전 9시
면담장소 - 서울 관악구 봉천10동 44-14
면담인사 - 이명애(관악주민연대 정책팀장. 난곡 새숲 도서관장)


대학시절에 자원봉사자로 전설적 철거민의 소외지역 난곡에 들어와 지금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이 지역의 터주대감, 산 증인이 되어버린 한 지역활동가. 지금도 관악주민연대의 사무국장이자 난곡주민도서관의 관장으로서 변함없이 청춘을 바치고 있는 여성 지역운동가. 바로 이명애 관악주민연대 정책팀장이자 난곡 새숲 도서관장이다.

과거 산동네의 가난한 마을은 재개발로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린 난곡과 관악지역에서 빈민운동에 몰두해 온 그녀와 지역운동가들은 이제 큰 방향전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말하자면 물이 말라버린 호수에서 살던 물고기들은 이제 날개나 다리를 가져야 할 때이다. 과연 어떻게 그렇게 날개와 다리를 나게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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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학과 전공 대학생들이 만든 난곡도서실

1987년의 6월 항쟁은 당시의 모든 대학생과 지식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도서관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1988년 전국도서관학과연합회가 만들어졌다. 이명애씨는 그당시 한참 피끓는 젊은이었다. 연세대 도서관학과 4학년이었고 바로 그 연합회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1989년 연합회의 선배들이 중심이 되어 난곡도서실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의 당시 회고담이다.

그 당시까지도 도서관이라는게 중고등학생들의 연애장소로 알려져 있어 도서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주민들과 가까운 곳에 누구나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만들자고 하면서 기왕에 만든다면 그 도서관의 혜택으로부터 가장 소외되어 있는 곳에 만들자고 했어요. 연대 도서관학과에 있던 81학번 선배가 이 곳 낙골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인연으로 가장 소외된 지역인 난곡에 만들어보자 이렇게 된 거지요, 더구나 이 지역에는 활동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 난곡도서관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1989년 3월 미리 도서관활동을 하고자 하는 학생과 졸업생 10여명이 난곡에 들어와 공부방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지역조사를 하여 10월에 문 열었습니다. 그 때는 난곡 종점 바로 뒤에 있었어요. 거실 하나를 쓰면서 사회과학 서적과 리얼리즘 소설 등 2천여권으로 시작했었죠. 동네 청년들이랑 청소년들이 많이 왔어요. 맨 처음 청소년모임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이듬해 6월쯤 되어 독서토론하는 청년모임이 만들어졌고. 그 다음에는 안해본 활동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활동을 했어요. 마당이 있어 탁구모임도 했구요. 미용기술이 있는 청년이 있어 그 사람에게 미용강좌도 열게 했어요. 그래서 소모임활동이 그 때는 아주 활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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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대여점과 함께 위기에

이명애씨는 난곡도서관이 만들어진 후 1년쯤 지나면서부터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대 어느 운동이나 그랬던 것처럼 이 도서관 운동 역시 활발하게 일어났다. 신나고 보람있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계속 그러지는 않았다. 95년이 지나면서 주변에 책 대여점들이 생겨나면서 위기가 닥쳐왔다고 말한다.

95년쯤 지나면서 대여점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 반경 500미터 안에 5-6개의 대여점이 생겼으니까요 대여점 바람이 크게 일었던 거지요. 주민들이 좋아하는 ‘영웅문’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이것을 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 살 수밖에 없었어요. 대여점에 주민을 완전히 뺏기지 않으려면 우리도 주민들이 좋아하는 책을 갖춰놓을 수밖에 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여점이 싼 값에 마음대로 보고 싶은 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길 수 없었답니다. 대출자와 이용자가 팍 줄었고 이런 어려운 기간이 2-3년 동안 이어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을 계속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지만 차마 문을 닫지 못하고 운영을 계속하는 실정이었어요.

그러나 또 사정이 바뀌었다. 97년 말 IMF가 오고 나서 이 지역에 큰 변화가 왔다. 정말 동네에 한집 건너 한집에서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아이들까지 버려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 정도로 계속 가다가는 굶어죽을 사람이 생기겠다 싶었고 이런 상황을 피부로 느끼던. 지역의 활동가들이 많은 위기감을 가졌다.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긴급구호활동을 벌였는데 이 난곡도서관도 그런 구호활동의 한 포스트가 되었다. 이때쯤은 대여점들도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 대신 난곡도서관은 직접 주민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도서관의 기능이 달라졌다

이렇게 도서관의 기능이 시기마다 달랐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1993년이 고비였다. 그 이전까지는 상승기였다. 가만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오던 시기였다. 그러니 활동가들은 주민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잘 모르고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가치에 따라 책을 골라 가져다 놓았다. 오는 사람의 욕구에 따라 책을 고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그런 것을 수용했다. 저변이 넓어졌다기보다는 골수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다. 책장을 제외한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아이들이 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3년을 정점으로 해서 대여점 때문에 하강곡선을 계속 그렸다. 애초 이것을 만든 사람은 모두 떠났고 동네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고 있었다. 이용자가 대폭 줄어들면서 문을 닫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잘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속 버티기로 결정되었다.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에는 과거의 좋은 추억들이 강한 힘이 되었다. 그때 즐거웠던 강한 기억들이 힘든 이 시기를 견디게 한 것이다. 1997-1998년 이 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생계비지원상담창구가 되는 등 여러 가지 기능을 다변화하게 되었고 동시에 지역단체와 더불어 다시 활성화되었다.

1998년 겨울에 난곡지역단체협의회라고 해서 협의회를 복원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도서관도 시너지효과를 얻었다. 2000년 두 번째 장소로 이사를 가면서 ‘어린이청소년을위한난곡사랑방’ 공간 안에 더부살이를 했다. 그 공간에 제약을 받았다. 어린이 청소년활동을 주로 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아동도서도 많이 사고 이용자층이 변했다. 예전에는 어른들과 청년들이 중심이었고 그중에서도 주부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아이들과 주부가 중심이 되었다. 이 때 검도교실, 보드게임, 비즈공예 등 프로그램도 많이 운영했다.

새로운 운영주체를 만들어야 할 때
- 주부들이 난곡 지역도서관의 운영주체로 나서야 한다

난곡 새숲도서관의 운영주체는 변모를 거듭하였다. 처음에는 운동권이었던 도서관학과 학생들, 그 다음에는 지역의 청년층, 그다음에는 과거의 청소년모임 출신의 청년들이 이 도서관의 운영주체로 계속 교체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운영주체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제는 청년조직을 만들기가 힘들다. 사회가 그만큼 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애 관장은 주부가 운영주체의 타겟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주체는 지역의 여성, 즉 주부들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계층이다. 이들이 와서 동력이 되고 활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에 아름다운재단에서 지원을 받으면 그런 쪽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이들이 주부를 점찍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2000년에 난곡에 재개발사업이 시작되었다. 2002년 10월에는 주민들이 모두 이사를 갔다. 지역 주민의 구성에 많은 변화가 올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단지로 변하고 거기에는 30-40대의 젊은 중산층 주부들이 가계와 육아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의 관심은 아이들이다. 40을 넘기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삶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이들이 이 지역도서관을 운영하고 그 콘텐츠를 채우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이라고 해서 옛날이야기와 심리학을 결합해서 자신을 투사해 보는 일을 하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난 3개월동안 운영해 보았다. 의외로 그런 프로그램들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분들이 이후에 소모임이나 후속모임을 하자고 합의를 했다. 어떻게 후속모임을 이끌어 갈지 고민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행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명애 관장 역시 이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자신의 딜레마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딜레마가 있어요. 도서관을 처음 만들면서 사람들을 조직해서 시작할 때와 이미 일정한 틀이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람을 모아내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몇 명의 엄마가 모여 지역도서관을 만드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도서관이라는 틀과 체계가 있어요. 올해가 19주년째인데 이렇게 20여년의 틀이 나름대로 있는 것이지요. 전혀 새로운 여성들을 만나 이들을 운영주체로 세워내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내가 도서관을 통해 서비스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도서관의 주인으로 되어 운영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재개발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과 새롭게 입주한 괜챦은 사람들을 잇는 다리?

재개발이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이 난곡에서 빈곤계층은 완전히 사라졌는지 관악주민연대가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종점 이후 산쪽의 인구(신림7동) 중에서 빈곤계층은 확연히 줄었지만 나머지 난곡길을 따라 아래에 있는 신림 13동, 3동. 12동에서 빈곤계층이 훨씬 늘어났음이 밝혀졌다. 독거가구, 기초수급자도 늘어났다. 재개발로 밀려나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정말 아주 외부로 빠진 인구는 오히려 많지 않았다. 그래서 도서관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거나 조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유입해 들어온 중산층들과 기존의 빈곤계층 사이에 난곡 새숲도서관의 고민이 있다. 이명애 관장은 이런 고민을 해 본다.

그래서 새로 유입된 조금 형편이 좋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돕는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예를 들어 1:1, 한 가정대 가정의 결연관계는 어떨까, 지역단체협의회가 운영하는 밥집이 있는데 그곳에 후원자들을 이 지역사회에서 만들고 이곳의 가난한 어린이들이 이곳의 혜택을 받는 것도 그런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역부족이다. 도서관 자체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하고 싶다.

정문으로 나가는 아이들과 후문으로 나가는 아이들

이 작은 지역사회에서의 빈부의 대조는 바로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

과거에 이 동네에 난향초등학교와 난화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이미 난향초등학교가 있는데 왜 다른 학교가 생겼는지 궁금했어요. 난향초등학교의 정문으로 가는 아이들과 뒷문을 이용해서 산동네로 가는 아이들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거지같은 산동네 아이들과 교육받는 것을 싫다고 해서 난화초등학교가 따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 곳이 국회단지로 개발되어 유력한 사람들이 제법 살았던 것이구요.

그러나 그 후 아이들이 줄면서 통합운영이 되면서 난화초등학교가 장애인전문학교가 되었다. 재개발 끝나고 과거의 후문이었던 곳이 정문이 되었고 그 정문을 통해서 나가는 아이들은 밀려난 가난한 집 아이들이고 후문으로 나가는 아이들은 모두 산의 재개발된 좋은 아파트로 가는 것이다. 아파트 갔다 온 아이들이 왜 우리집은 이 모양인가 하고 불평한다고 한다. 자기 집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와 인식은 여전한 부분이 있다.

사실 가난하다고 인간적으로 열등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쉽게 “저아이가 어디 산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금방 상처받는다. 이런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난곡 지역운동단체들의 어제와 오늘

난곡은 서울에서도 가장 유명한 빈민지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운동도 가장 활발한 지역이 되었다. 지금 현재까지도 7개의 기관, 즉 난곡주민도서관, 낙골공부방, 우리자리공부방, 남부교육센터(과거의 야학), 낙골교회, 일터나눔지역자활센터, 꿈학교(대안학교)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모여 난곡지역단체협의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난곡지역단체협의회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 1998년인데 그 이전에는 난곡지역협의회가 있었다. 그것은 단체연합이 아니고 개인들의 모임이었다. 빈민운동을 하기 위하여 주로 학생출신과 이 지역 청년들이 모인 것이었다.

결식아동을 위한 사랑의 밥집과 난곡사랑방을 이 단체협의회가 운영하고 있다. 조직적으로 보자면 언발란스하다. 단체협의회는 일상적인 소통을 하는 네트워크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산하에 두 개의 부설기관을 가지고 직접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회원 단체의 역할이나 상황이 모두 변하고 있다. 낙골교회의 경우 일종의 종가집 역할을 했다. 낙골교회 출신이 가장 경험도 많고 이 교회가 조직화한 주민들의 숫자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그런 기능이 퇴색했다고 한다. 그냥 또 하나의 단체가 된 것이다. 교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지역의 상황이 바뀐 것이다.

관악의 빈민운동단체들의 연합기구 - 관악주민연대의 빛과 그림자

1991년 지방선거에 김혜경선생이 선거에 나오면서 난곡지역의 관악구의회 주민후보로 당선되었습니다. 빈민운동판에서 주민대중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논의가 활발하던 때였어요. 1991년 6월부터 난곡주민회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2-3년정도 하다가 준비위원회를 떼고 주민회로 출발해야 하는데 1993년 지나면서 해소되어 버렸어요. 이와 비슷하게 빈민지역인 봉천 3.6동과 5.9동에서도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개 지역과 신림 10동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어요. 지방선거와 재개발사업이 이런 모임의 결성을 촉발하였어요. 동단위에서 대응하던 것을 함께 모여 대응하자고 했습니다. 김혜경선생이 구의원이었으니까 동절기 철거 금지를 탄원하자고 해서 1만명 정도 서명을 받았지요. 그것이 통과되면서 그 동력을 가지고 1995년 3월에 관악주민연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관악주민연대는 그당시로는 상당한 활동력을 가졌다고 한다. 동마다 각 지역모임이 있었고 지역마다 신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난곡에서는 난곡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이것을 모아 관악주민연대는 관악주민신문을 내기 시작했는데 1997년 무렵 주식회사로 전환해서 신문을 안정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관악주민연대에서 관악사회복지라는 기관을 부설로 만들었다. 그당시 공부방이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활동한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관악사회복지가 탄생되었다. 1994년 대선이 끝난 뒤 지역운동판에서 많이 나온 것이 전문성이라는 이야기였다. 과거에 공부방을 하면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지만 실제로 활동가들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주민들을 조직하는 거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선이 끝나면서 공부방이라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아야 하고 아동교육의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빈민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방향모색, 전문성강화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관악사회복지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이것을 통해서 공동의 지역복지를 고민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관악주민연대의 활동은 지역의 철거싸움이 중심이었고 관악구 안에서 벌어지던 온갖 철거과정에서의 주민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그러다 보니 관악주민연대 부서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지방정치위원회, 재개발위원회였다. 특히 세입자대책위원회가 각 지역에서 결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네 개 지역의 활동가들과 세입자대책위원회, 서울대의 학생운동그룹이 만나서 폭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렇게 해서 1997년까지는 수직적 상승의 활동을 했다가 1998년 이후 동력이 떨어졌다. 그것은 동시에 철거과정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관악주민연대의 활동과 고민

사실 재개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활동가들의 소진과 상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이 활동가들을 100% 신뢰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주민들이 사업자와 야합하여 엉뚱하게 타협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동력이 떨어지면서 관악주민연대의 활동이 뭐냐, 내가 주민연대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문제제기가 이어지기도 했다. 또 IMF의 후폭풍도 있었다고 한다. 실업극복본부의 지원을 받아 각자 사업을 하면서 분해과정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99년 다시 주민연대가 무엇을 할지, 회원을 어떻게 할지 논의가 거듭되었다. 이명애씨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당시에는 구로시민센터, 광명주민센터 등 구단위로 새로운 지역운동조직이 생겨나고 있었어요. 이런 단체가 빛을 보면서 그 모델로 재편해보자고 견해가 우세했죠. 좀 더 중간층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시민운동개념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논의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출마를 하거나 출마자를 도와야 한다면서 그 논의의 주도자들이 떠나버렸는데요. 대학시절부터 관악지역에서 활동해온 신장식과 김경환이 바로 그 분들인데요. 그들이 빠지면서 논의가 정체에 빠졌어요. 그 후 결국 개인 멤버쉽으로 하되 과도기적으로는 각 지역의 기관들이 지원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개인 멤버쉽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2002년 내가 사무국장이 될 때까지 난곡이나 봉천동 등 지역의 기관들이 회비도 내고 사업도 함께 했구요. 낙골교회에서 사무국장을 담당하고 봉천동의 두 개 교회에서 사무국장의 인건비를 댄다는 식으로 그 이전에는 활동했던 겁니다.

과거의 활동 동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관악구 안에서 지역운동으로서 의미있게 활동하는 조직이나 기관은 25-30군데나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하면 많은 편에 속한다. 관악주민연대에 현재는 파견자까지 포함해서 7명의 상근자가 두가지 큰 방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역공동체 복원과 지역의정 개입활동이다. 지역공동체복원사업으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 지역의 아파트 입주가 끝났기 때문에 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지원사업을 주로 했다. 이렇게 해서 임대 아파트 안에 공부방이나 도서관을 만들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여성들을 자원활동가로 조직했다. 이분들을 중심으로 먹거리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녹색가게도 두 개 운영하고 있고, 지역에서 모금해서 독거노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하나의 관악주민연대 핵심사업으로서 의정행정감시도 열심히 벌이고 있다. 주민들의 욕구를 잘 수렴해서 이슈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잘 안된다고 한다. 그 욕구를 모으고 의정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산감시도 하지만 예산분석보고서를 내거나 정책에 대해 제안하는 일은 주민들에게 크게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의 경제사회적 변동에 따라 주민운동의 방향이나 성격도 크게 변할 수밖에 없다. 관악구 지역 일대에 산재하던 달동네나 빈민지역이 지금은 모두 재개발이 완료되어 이미 중산층 지역으로 바뀐 것이다. 지역운동도 이에 따라 새로운 중산층 지역운동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된다고 이명애씨는 고민을 토로한다.

과거 여기 관악구의 달동네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모여 모두 고민하고 있다. 지역이 많이 변했다, 중간계급에 속하면서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지역운동을 펼쳐야겠다는 이야기가 몇 년째 나오고 있다. 그런 조직들이 활동해오던 관성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 초점이 가 있어서 그런지 그런 지향은 있지만 제대로 방향전환을 못하고 있다. 그런 중간계층을 만나기 힘들다. 지금 잘나간다는 마포의 성미산은 어떻게 가능한가. 운동에도 업보가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한다. 도림천주민모임이 중간계층의 운동인데 지금은 활력을 잃었다. 관악에서는 중간계층의 지역운동이 별로 없는 셈이다.

눌러앉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 - -

이명애씨는 연세대를 졸업하면서 새파란 새내기 활동으로 이 지역에 들어와 지금은 마흔을 넘긴 중견활동가가 되었다. 이미 난곡과 이 지역 주민운동의 산 증인이 되었다. 아니 아직도 이 지역을 버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의 중심테마로 삼고 있다. 그녀에게 난곡은 무엇인가. 지역운동.주민운동은 도대체 무엇인가.

난곡에 처음 왔을 때 나름대로 동네에서 활동하고 있던 활동가나 주민참여자들이 텃새가 있었어요. 초창기에는 여기에 눌러 앉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학교를 마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난곡도서실이었는데 1년정도만 일하고 다른 곳에 취직해야겠다고 하면서 들어온 것이었어요. 20대 중반.후반까지는 당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내가 여기를 그만두면 더 좋은 선택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1983년에 낙골교회가 생겼는데 여기에 학생운동가들이 열정에 불타서 왔다가 조금만 지나면 뿔뿔이 나가버리는 것을 보면서 뿌리깊은 사람들 사이에는 불신이 깔려 있었답니다. 이런 문제로 많이 싸웠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왜 그렇게 오해하느냐는 식이었지요. 알력이라면 알력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내 나이 30이 지나면서 나 스스로에게도 다른 기회가 차단되는구나 깨닫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1996년까지는 도서관에서 자원활동을 한 것이고 급여를 받은 것은 도시빈민연구소였어요. 이 연구소의 사서 겸 총무로서 일하고 저녁에는 낙골로 와서 일했어요. 보통 오후 4시에 문열어 저녁9시까지 문을 열었다. 청년모임은 모두 직장인들이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있었는데 나는 그당시 일요일 하던 청소년모임을 운영하는 일을 하면서 의식화된 청소년을 키워냈지요. 모두 33-34살이 되어 지금은 이들이 도서관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돈도 내고 모임도 기획하고 있는 거지요.

활동을 시작한지 3-4년 동안은 초기 10여명의 도서관학과 출신과 그들의 후배들로 계속 충원되었는데 1994년 이후 전체 운동판이 다 그렇지만 대선이 끝나면서 패배의식이 팽배해 졌습니다. 이런 활동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고 뭔가 변화하는 것이 어렵다고들 느꼈지요. 활동하는 선배들도 대부분 떠나고 나만 무슨 인연이 있는지 이사도 오고 여기에 눌러 앉게 되었어요.

차라리 이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학시절의 작은 인연이 마침내 난곡의 지킴이가 된 것 말이다. 이명애씨의 말 속에는 약간의 쓸쓸함과 지금의 어려움에서 나오는 작은 한숨이 깃들여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2009/05/14 04:37 2009/05/14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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