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희망이현실로 함께만드는서울 원순씨와10cm더 글수레
검색버튼

86. 민들레홀씨가 바람에 날려와 만든 마을<1편>

2009/03/19 20:41

<박원순의 희망탐사 86><1편>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와 성미산 마을을 만들다
- 성미산 마을 운동의 시종(始終)

면담일시 - 2008년 3월 15일 오후 2시
면담인사 - 유창복(성미산 마을극장 대표)
면담장소 -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 작은나무 카페



작은나무가 생긴 사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창복씨가 책임자로 있는 마을극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우리는 유창복씨가 잠깐 밖에 나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 해서 그동안 이 극장을 둘러 보았다. 함께하는시민행동, 환경정의, 여성민우회, 녹색교통 등 네 개 단체가 모여 공동으로 건축하여 만든 공동건물 나루 지하 2층에 마을극장이 위치해 있었다. 아주 좁지만 마을의 여러 공연이 열리기에는 아주 행복한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임시사무실은 너무 좁아 가까이 있는 카페 작은나무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먼저 이 작은나무 카페 이야기부터 시작하였다.

동네 아줌마들이 처음 투자해서 카페를 하나 만들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만 먹으면 야단이 났다. 몸이 가렵다. 그래서 동네 어머니들이 아토피 없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가게를 하나 열어보자고 했다. 엄마 5명이 합동하여 열었는데 전체가 운영하면서 운영의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한사람이 운영했는데 다시 그 집 아이가 상급학교로 가면서 분당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결국 이 가게를 내 놓았다. 그때 이 곳이 이미 동네 사랑방이 되어 부동산에 내놓을 수는 힘들었다. 성미산 학교 선생님들이 스터디클럽을 하면서 아이들의 작업장이나 전시장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들의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 양도하면서 그 전의 어머니들이 유기농아이스크림을 만들 것과 마을사랑방의 성격을 유지할 것을 전제로 제시했다. 이렇게 하여 10여명의 선생님들이 100만원씩 재투자를 하여 1년간 운영하였다. 학교와 가게를 동시에 운영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 다시 주민들이 맡기로 하고 주민들이 다시 투자하였다. 지금은 흑자도 내고 주부들이 돌아가면서 맡아 운영하고 있다. 마을카페에는 늘 마을의 이야기로 가득하게 되었다.

부동산이 점지한 마을 - 민들레 홀씨가 내려 성미산마을이 되었다

성미산 마을의 공동체를 일궈내는데 주역이라고 할만한 유창복씨에게 도대체 이 마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부동산이 점지한 마을이라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년에 얼른 든 생각이다. 우리 마을의 형성이 다른 곳과 다르다. 부산 반송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은 의식이 강한 활동가가 어디로 갈까 결정하고 거기 가서 지역주민과 소통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마을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엄청 고생을 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하고 낙하산타고 내리는 것과 달랐다. 우리는 우연히 홀씨 하나가 떨어져 내려 민들레가 온 들판에 퍼진 격이다. 부동산이 점지한 곳이라고들 한다. 부동산소개소가 소개하여 공동육아를 하고 그래서 어른들이 친해진 것이다.

지역운동이 낙하산 타고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민들레 홀씨가 지연스럽게 퍼지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누구는 그렇게 온 들판에 자연스럽게 퍼지는 지역운동을 안하고 싶어 안하는가. 도대체 성미산마을운동의 비결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민들레 홀씨처럼 퍼졌다는 말인가.

식단을 만들 때 계란을 넣을지 말지 결정하면서 2박3일 토론하였다. 이것은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모두가 끝까지 토론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소통의 훈련을 한 것이다. 회의 빨리 끝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처음에는 자기가 말을 빨리 끝내야 회의가 빨리 끝내는 줄로 알았다.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빨리 잘 들어야 회의가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법을 잘 알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이렇게 논의하고 토론하다 보니 이제 어느 집 숱가락이 몇 개인지, 오늘 저 집은 한바탕 하고 나왔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마실을 가면 그 집이야기를 다 전해 듣게 된다. 이웃사촌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관계의 친밀감을 형성한 것이다.

모든 일은 결국 관계에서 시작된다. 모든 일은 사람이 시작하고 사람이 끝낸다. 그런데 그 사람을 모아내고 모이는 것은 관계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함께 논의하고 서로를 잘 알게 됨으로써 그런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회의를 빨리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회의를 빨리 끝낼 수 있다는 말도 인상적이다. 다음으로 유창복씨는 어린이집을 만들게 된 사연을 소개하였다.

어린이집을 만들게 된 동기가 이렇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면 산수를 가르치고 영어를 비디오로 보여준다. 너무 인지적으로만 가르치려 든다. 이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우리 어린이집은 사설유치원은 아니고 그렇다고 정부기관이 하는 것도 아니다. 맞벌이니까 직접 키울 수도 없었다. 결국 공동육아를 접하게 된 것이다. 나와 같은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시장이나 정부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린이의 집을 함께 만들기로 하였다. 혼자서 안되는 일을 함께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협동의 성취를 맛본 것이다.

대안학교 성미산학교를 만든 사연

이런 어린이집의 경험이 동네만들기 기초가 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은 어린이집은 여러 곳에 있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여기에서만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한마디로 성미산싸움 때문이다. 성미산 정상에다 배수지를 만들어 유사시에 물을 수도로 배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우리의 주장이 님비가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10여년 전에 상수도과에서 계획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도 시설의 누수율을 대폭 줄이는 등으로 그 시설을 안해도 상수도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배수지가 필요 없다는 쪽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왜 여기서 하느냐고 하다가 나중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고 이제는 배수지가 필요 없다고 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이렇게 성미산싸움은 성미산 마을공동체가 생겨나는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다. 도대체 성미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이렇게 하여 성미산은 우리가 지키자고 결정했다. 막상 산에 올라가니 60-70대 어른들이 30년째 산에 오르고 있었다.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이들은 산에 올라가서 놀았지만 우리는 산에 관심이 없었다. 그 분들은 대부분 원주민들인데 이들은 관에서 하는 일을 어찌 막겠느냐고 했다. 물론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이렇게 하여 2년을 그분들과 산을 지켰다.

그렇게 해서 이기고 나니까 확 달라졌다. 우리 끼리 아이를 가르치면서 맺은 관계는 젊은 부부들간의 소통이었고 지역사회에 큰 사이즈의 소통을 못했다. 소수지만 지주들과 유지들은 개발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배수지를 짓는 자본이 들어오고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우리를 성미산지킴이들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상한 아이들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넓은 소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이 관을 상대로 배수지건설 반대, 성미산지키기 운동을 해서 이겼다는 것은 잘 믿기지 않는다. 2년동안 버티면서 매일 밤 텐트를 치고 그 밤을 견뎠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더 기막힌 전략을 썼다. 바로 선거출마운동이었다.

2002년에는 구청도 안알아주고 시청도 몰라 하니까 우리가 선거에 나가 홍보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키우기 위해 결정한 것이다. 홍대 앞에 사는 조윤석이가 하는 황신애밴드를 활용하기로 했다. 조윤석이가 서교동, 연남동에는 이연찬 할아버지, 성산동은 김종호(마포연대 대표)가 동시에 구의회에 출마했다. 당시 모두가 신나게 운동했다. 자전거에 적은 확성기를 달고 다녔고 컨서트니 공연 등의 온갖 쇼를 다했다. 물론 무소속이었고 모두 떨어졌다. 문제는 모두가 2등을 했다는 사실이다. 적지 않은 표를 얻었고 무엇보다도 성미산의 진실을 널리 알려낸 것이었다. 지역사회,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인 노인, 어른들과 이야기해 본 것이 또다른 경험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미산 싸움을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단결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 이전에 했던 육아운동은 단지 몇 사람의 문제였다. 육아라는 것도 공공적인 의제이긴 했지만 내 새끼 문제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산을 가지고 싸운 것은 훨씬 큰 공공적 일이었다. 그 후 성미산 주변의 마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성미산싸움을 하고 나니까 놀랄 일이 생겼다. 우후죽순 생겼다. 제일 먼저 카센터 차병원이 생기고 동네부억이 생겼다. 그 다음에 생협매장이 확대되었다. 라디오방송국이 생기고 성미산 학교가 생겼다. 다양한 동아리, 활동프로젝트가 생겼다. ‘멋진 지렁이’라는 생태 클럽, 댄스그룹이 생겼다. 뭐가 생기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 속도가 줄지 않는다.

그 변화는 이렇게 다양한 조직을 잉태하고 마을을 하나의 유기체로 발전시켜 갔다. 그리고 성미산 싸움의 결과는 곧바로 성미산학교를 만드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어린이집에서 키울 때는 학부형들끼리 논의하고 담합해서 일정시간만 게임을 하게 게임시간을 통제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가면서 그것이 안되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선생님이 아이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반말로 왜? 하고 대답해 말썽이 일었다. 어린이집에서는 평등하게 서로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도 반말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들에게 이상한 아이들로 찍혔다. 숙제 안해 왔다고 혼내 주면서 부모를 부르니까 이번에는 부모들이 “아이들 가르쳐달라고 학교 보냈는데 학교에서 안가르쳐주고 혼만 내면 어떡하냐”고 대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는 어린이집 출신 부모가운데 학교운영위원으로 뽑아 보내서 잘 설명하려 들었다. 그런데 결국 실패했다. 끼리끼리 잘 키워보자고 했는데 다른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제대로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판단하였다. 결국 대안학교로서 초.중.고 과정을 만들기로 결의를 하게 되었다.

<2편으로>

2009/03/19 20:41 2009/03/19 20:41

http://wonsoon.com/trackback/213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