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하나의 대륙, 인도로 가다 7월7일(월요일) 이레째 인도의 마을과 마을을 지나서 뉴델리에서 출발해서 버스로 아그라까지 200여 키로미터를 달렸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라면 두시간이면 충분할 길을 무려 4시간 반이나 걸렸다. 분명히 3번고속도로라고 씌여져 있었다. 그러나 작은 도시를 지날 때는 도심을 통과해야 했고 주가 바뀔 때마다 통과세를 내느라고 한참씩 기다려야 했다.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잡상인들이 몰려들어 유리창을 두드리며 물건을 사라고 아우성이었다. 원숭이, 곰, 코브라 뱀을 데리고 다니면서 묘기를 보이고 돈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도, 동물도 가난한 나라에서는 함께 고생이었다. 그토록 더운 날씨에 몸을 움직여야 하니. 말이 고속도로이지 곳곳에는 소나 돼지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가 잠깐 멈추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안내원 Roi가 하는 말이 생각난다. 인도에서는 8가지가 길을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 사람, 우마차, 소와 돼지, 릭샤, 오토 릭샤, 자동차, 냉차판매 리어카(구루마), 자전거 등이 그것이다. 이러니 교통이 잘 소통될 리가 없다. “인도(印度)에 인도(人道)가 없다”는 말이 맞다. 우마차와 릭샤. 오토 릭샤가 다니는 길을 전용선으로 만들어 천천히 다니게 하고 나머지 자동차를 위해 두개 차선을 지정해 두면 교통 흐름이 훨씬 나아질 듯 하다. 소와 돼지는 주인이 집에서나 일정 구간에서만 키우게 하고 도로를 활보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렇게 차선도 신호등도 없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이 울린다.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이것도 참으로 인도스러운 풍경을 만들어내기 위함일까? 어찌되었든 이 왕복 9시간의 행군을 통해 우리는 인도의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 도로와 도로를 시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마을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눈망울을 수없이 마주치며, 그 들판과 나무들과 그 속을 노니는 소와 돼지들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고등수학을 풀어야 하는 느낌으로 인도 사회의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보게 된다. 깊이를 감히 모를 인도 속으로 우리가 수없이 빠져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아! 타지마할! 아그라에 도착하자 말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우리는 바로 타지마할로 갔다. 식사를 한 호텔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타지마할을 릭샤를 타고 갔다. 그런데 이 빼빼마른 중년의 아저씨가 두사람을 태우고 연신 땀을 닦으며 페달을 밟았다. 생각같아서는 내려 걸어가고 싶었지만 이것이 이분의 밥벌이고 또 내리겠다는 것이 오히려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바늘 방석같은 릭샤 의자에 엉덩이를 간신히 붙이고 있었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5대황제인 샤 자한이 자신의 열두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부인 무무타지마할의 무덤으로 만든 건축물이다. 1632년부터 22년동안 매일 2만명을 동원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 하니 얼마나 큰 공이 들어갔는지 알고도 남는다. 책에서 보던 것 보다는 작게 보였다. 타지마할은 아마 한국인, 더 나아가 전세계인에게 구원의 성지 같은 곳이나. 너무 많이 말해지고 씌여지고 찬탄되어지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막상 와 보면 그 작은 규모에 실망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하얀 대리석을 얼굴로 한 이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사진보다 더하다. 어떻게 규모로만 따질 것인가. 더구나 그곳이 한 여인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큰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아름다움은 더욱 신비로울 뿐이다. 그 디자인과 흰 색이 멀리서도 여성적이다. 하나 하나의 문양이 온갖 꽃들로 이루어져 그 세공의 기술과 정성이 짐작하기 어렵다. 원래는 그 모든 것이 보석이었는데 일부는 영국이 빼 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만큼이라도 원형이 남아 있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가이드 로이의 말처럼 이것은 이슬람 사원도, 불교사원도 아닌 단지 사랑의 기념탑이니 누구도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사랑의 힘이야말로 종교를 뛰어 넘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타지마할이 더욱 사람들의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샤 자한이 그 아들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를 뺏긴 채 여기서 몇키로미터 떨어진 아그라성 한켠에 감금당한 채 8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죽어야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부인의 묘를 만드는데 썼으니 그 아들의 쿠데타의 명분이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는 국고를 탕진하는 사업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인도를 방문하는 많은 방문객이 바로 이 타지마할 때문이라는 사실은 바로 타지마할이 인도 재정의 원천이 된다는 웃지못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방문한 아그라성의 샤 자한의 유폐장소에서도 멀리 야무나 강가에 하얀 보석처럼 빛나는 타지마할이 보였다. 그는 그 비극의 장소에서 먼저간 부인을 그리며 위안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한 남자의 끔찍한 러브 스토리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으로 가슴을 채운다. 공간과 시간을 넘어. 아그라 성 타지마할에서 몇키로 미터 떨어져 있는 아그라 성을 보면서 당시 무굴제국의 위용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밖으로 두 겹의 해자를 만들고 그 위로 성벽을 높이 쌓아 어떤 공격자도 감히 이 성곽을 넘을 수는 없을 듯 보였다. 더구나 그 해자에는 물을 채워 굶주린 악어를 풀어 놓았다니 어떤 침입자가 무사히 그곳을 건너기는 불가능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 해자 속에는 물이 마르고 악어는 온데간데 없다. 다만 원숭이 가족들만이 그 성곽 사이로 놀이를 즐길 뿐이다. 아그라 성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 한 대륙을 지배했던 왕조의 영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가운데를 파내 왕의 목욕탕으로 씌였다는 집채만한 바위 목욕탕, 왕과 왕비만이 쇼핑을 즐겼다는 시장터, 그 한가운데 연못을 만들어 낚시터로 사용했던 곳이 하나같이 오늘날까지 신비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저 멀리 야무나강의 강물이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모습이 바라보이는 왕비의 침소에서 그때의 음악과 향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이곳은 영국군에 의해 짓밟혀 군대 주둔지로 쓰이다가 지금도 그 부근에는 인도군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다시 성 밖으로 돌아나오며 그 성의 정문에서 마치 성 안으로 달려들어오는 당시의 마차를 환영처럼 본다. 당시의 인도 대륙전체를 호령했을 이 절대권력의 현장이 이제 단지 붉은 사암의 벽돌만이 처연하게 드러나 하나의 신기루로 변한다. 그렇게 인간과 역사는 무상하게 변전하고 있다. 7월 8일(화요일) 여드레째 양극단이 공존하는 인도 언제 이번 여행을 떠났는가 했더니 벌써 여드레째다. 여러 재단.가게 간사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니 한결 낫다. 일부 간사들은 설상와 몸살로 고생하고 있다. 김민희 간사가 특히 심한 것 같다. 내가 이번 여행 준비의 불철저와 업무과정의 문제를 가지고 몇차레 혼을 냈더니 스트레스를 받은 듯 싶다. 미안하다, 아직 대학졸업한지 얼마안된 신출내기이니 잘 가르키고 격려해야 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네팔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도 심각하지는 않지만 매일 설사를 조금씩 하고 있다. 물갈이를 반드시 해야 한다더니 필수 코스인가 보다. 간디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어제 본 길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확 트인 공원이 녹색으로 가득차 영국의 리치몬드 파크이나 하이드파크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영국의 식민 당시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영국이 남긴 좋은 일도 이렇게 있는 모양이다, 양 길가로 고급 주택과 건물들이 연이어 있다. 가끔 대사관도 보이고 연구소도 보인다. 가이드 로이의 말에 따르면 장관들의 공관도 이 거리에 있다고 한다. 장관직을 떠나면 이사가야 한다고 한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이지. 그런데 로이의 말이 이어진다. 이 나라에는 장관되면 모두 부자된다는 것. 오늘 아침의 The Hindu라는 신문에 보면 UNDP의 Human Development Index가 발표되었는데 인도는 175개국 가운데 127등을 했다는 것이다. 작년의 124등급에 비하면 더 악화된 셈이다. 물론 다른 나라가 발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등급이 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도 다수 국민들의 삶의 질은 형편이 없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장관되면 부자된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간디묘소 방문 He Ram 오 신이여! 간디가 극우힌두교도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남긴 마지막 신음같이 내뱉은 말. 이 한마디만이 새겨진 간디의 묘소. 물론 그의 시신은 화장해 야무나강에 뿌려졌고 단지 그를 기념하는 검은 대리석이 수많은 인도인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인도의 분열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며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Let all of us Hindus, Muslims, Parsis, Sikhs, Christians, live amicably as Indians, pledged to live and die for our motherland, let it be our ambition to live as the children of the same mother retaining our individual faiths and yet being the countless leaves of one tree.
그런 염원이 한 방의 총격에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쟁이,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의 내전이, 인도내의 끝없는 힌두와 무슬림의 사건들의 씨앗이 이렇게 뿌려졌던 것이다. 그토록 간디가 온몸을 던져 막고자 한 비극의 씨앗이. 내가 인도에 도착한 이 며칠새 톱뉴스는 봄베이에 가까운 Vadodara에 가까운 지역에서 벌어진 Best Bakery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2002년에 벌어진 사건인데 힌두교도들이 무슬림의 가정을 공격.방화한 것이다. 증거미약을 근거로 기소된 사람들을 석방하면서 논란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 인도 안에도 무슬림들이 12%가량 살고 있는데 이들은 언제나 이런 공격의 위험속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뿐만아니라 캐시미르 지역의 분쟁은 이따금 국제적 뉴스가 되고 있다. 이 가난한 나라에서 서로간의 적대 관계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경쟁을 벌이며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다. 지금 간디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는 외쳤을 것이다. 오, 신이여! 간디박물관 - 간디가 가르치는 것 원래는 간디묘소에 이어 뉴델리의 전래시장을 방문하기로 하였던 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간디 탐구를 이대로 그칠수는 없어 가이드에게 간디박물관 방문을 강청하였다. 다시 2-30분이 걸려 도착한 곳은 사실상 간디가 마지막 흉탄을 막고 쓰러진 그 현장이자 그가 최후 수개월을 인도 분열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벌였던 그 장소였다. 그가 머물었던 방에서 연설을 위해 나갔다가 피격당한 그 장소까지는 한 걸음 한걸음 발자욱을 모형으로 떠 그대로 남겨놓아 운명의 순간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어 두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간디가 남긴 유품들. 그 유명한 안경, 허름한 책상 하나, 샌들, 염주, 힌두 경전 바그바드 기타, 그리고 베개 하나가 전부였다. 마지막 순간 있었던 그대로 바로 그 방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는 바로 수도승이었고 구도자였다. 무엇보다 그가 평소 주장한 무소유의 삶의 실천이었다.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커다란 자극이다. 박물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 각종 사진은 그가 마치 살아돌아와 우리들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식민지 청년으로서 변호사가 되고 의기양양하게 귀향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의 억압받는 인도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인권투쟁에 나서게 되고 더 나아가 인도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된다. 그 이후 그가 벌이는 비폭력 저항의 투쟁은 무력으로 진압하고 억압한 점령자 영국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고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디의 삶은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기 이전에 자신을 수양하고 훈련하고 마침내 도덕적 완성체를 이룩한 높은 영혼과 인격의 경지였다. 그의 모든 어록과 행동의 발자욱은 바로 그를 우러르고 그를 배우는 단초들이다. 입구 서점에서 그의 어록, 전기, 연구서 등을 몇권 샀다. 언제 조용히 시간을 내서 간디를 연구해야겠다. 그리고 뭔가 변화를 만들어내야지. Planet Finance India 한참을 찾아 헤메고서야 간신히 주택가에 있는 인도 Planet Finance를 찾을 수 있었다. 인도의 신흥 주택가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직 구획이나 지번부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 유능한 현지 가이드들도 잘 찾지를 못해 결국은 사무실로 전화를 해 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와 데리고 가 주었다. 하기는 아직 이 사무실의 간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4-5층짜리 주거용 아파트의 1층을 2-30평 쓰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이 단체는 이미 우리 재단 간사들이 지난 5월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대출을 해 줌으로써 가난의 굴레를 끊고자 하는 이른바 Micro-credit은 이미 Gramin Bank에서 본 것처럼 전세계적 유행이 되어 있다. 기존의 금융권은 어느 나라에서나 별무 소득이고 귀챦기만 한 소액대출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조금씩의 융자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들은 소득의 원천을 만들 수 있고 가난의 악순환을 제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바로 Micro-credit를 창안한 사람들의 아이디어이다. 재단이 이토록 관련단체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 모델이 과연 우리에게도 적용될지 여부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이미 이 문제는 우리 재단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태평양그룹의 유족들이 ‘장원 서성환의 아름다운세상 기금’ 50억원을 재단에 기부하면서 서로 가난한 모자가정의 창업지원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과거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바로 이문제로 씨름하였다는 인도지역의 코디네이터 Harish Chotani씨는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에서 60여개 NGO 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Planet Finance의 특징은 직접 빈곤층에 대출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Micro-credit 사업을 벌이고 있는 단체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들은 금융기관으로서 허가를 요구하는 경우 단순히 NGO로서 등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Planet Finace India는 이 지역에서 이들 micro-credit단체들에게 정보와 지식, 경험을 나누는 활동에 주력한다. 그 방법으로 이 서남아시아 전체를 카버하는 포탈사이트를 만들고 각 단체들에게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여 그 단체의 활동가들과 일반 소액대출자들이 여기에서 정보와 경험을 얻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이 Planet Finance 사무실의 운영경비는 European Commission에서 나오는 돈에서 충당된다. 현재 Micro-credit사업단체들에게 제공한 돈은 50만불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더 투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Harish씨는 돈보다 경험과 지식을 제공하는 일이 더 큰 것이라고 주장한다. 외국에서 오는 돈 보다 대출자 상호간의 기금으로 자립성을 갖추는 것이 micro-credit의 숙제이기 때문에 외부에서의 돈 보다 자체내에 어떻게 자립적인 기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직은 이 단체도 9개월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현재 사업의 평가는 어렵다고 한다. 아름다운재단의 micro-credit사업에 대한 조언을 구했더니 먼저 지원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빈곤’에 대한 정의, 빈곤층의 특색(알콜릭인지 슬럼에 사는지, 농촌.도시 빈민 어디에 속하는지 등등), 자금용도(창업자금인지, 교육자금 또는 주택자금인지)에 대한 분명한 상황이 파악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막연히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만으로 이 사업에 도전할 수는 없다. 우리가 돕고자 하는 모자가정의 조건과 상황이 먼저 파악되고 어떤 방식의 지원이 이들에게 소망되고 그 소망을 해결할 수 있는지 훨씬 깊은 연구와 논의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앞으로 상호교류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긴 시간을 나누지 못한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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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무역과 마이크로 크레딧을 고민하는 기행 5 - 플레닛 파이낸스 인디아
2010/02/1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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